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알렉시오스 3세 (문단 편집) == 외교 == 그의 외교 정책은 기본적으로 대제 마누일 1세의 시기의 기조로 돌아가는 데 방점이 찍혀 있었다. 안드로니코스 1세가 파괴해버린 국제 공조 체제는 이사키오스 2세에 의하여 [[살라흐 앗 딘]]이나 남이탈리아의 [[시칠리아 왕국]] 등 주요 강국과의 공개적 동맹을 통한 안전보장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이는 한창 패권국으로 떠오르던 [[신성 로마 제국]]을 자극하는 조치였고, 다른 잠재적 동맹자를 제외해버렸으며, 살라흐 앗 딘과의 동맹은 서유럽 가톨릭으로부터 적개감을 사는 악수가 되었다. 1195년에 시칠리아 왕국이 신성 로마 제국에 의해 무너지고 호엔슈타우펜 가문이 상속받게 되자, 이것이 시칠리아 왕국의 발칸 반도 침입의 계기가 되었다. [[하인리히 6세]]는 1185년에 시칠리아의 대군이 동로마군의 반격에 무너졌던 사례를 생각하여 먼저 외교적으로 동로마 제국을 압박했다. 그 사절단은 정권이 교체된 이후 콘스탄티노플을 방문한다. 알렉시오스 3세는 이런 정도의 부담을 쉽게 지나쳐버릴 수 없었다. 결국 협의 끝에 1196년, 막대한 공물을 제공하는 형식으로 패권을 인정하는데 합의하였다. 그나마 하인리히 6세가 1197년 사망하면서 저 공물을 지불할 필요가 없어졌다는게 동로마에겐 천만다행이었다. 알렉시오스 3세는 이후 다방면의 외교 활동을 전개했다. 통상 마찰이 계속 있어왔던 베네치아와는 1198년에 통상 겸 동맹 조약을 체결하였고, 베네치아를 다시 견제하기 위하여 피사, 제노바 등과도 외교 관계를 수립했다. 1198년에는 역시 교황청과도 [[교회일치]] 문제나 십자군 문제를 두고 외교를 재개해 언제든 부활할 여지가 있는 신성 로마 제국의 [[호엔슈타우펜 왕조]]에 맞선 잠재적 동맹자로까지 지위를 강화했다. 이외에도 [[룸 술탄국]] 왕조에서 벌어진 내분으로 망명한 술탄 케이휘스레브 1세를 잘 대접하여 추후 술탄이 정계로 복귀한 이후에는 유력한 동맹자의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리하여 오랫동안 이어졌던 룸 술탄국과의 전선도 안정 국면에 접어들고, 더 이상의 영토 상실도 피할 수 있었다. 그는 1200년 여름에 수도를 방문한 [[키예프 공국]]의 사절단도 융숭히 대접하는 가운데, [[갈리치아-볼히니아]] 공국의 군주 로만 므스티슬라비치와도 관계를 수립했다. 이후 로만은 1200~1년에 걸쳐 쿠만족의 본거지를 대대적으로 공략했다. [[불가리아 제2제국]]의 주 병력원이었던 [[쿠만]]이 전쟁에서 사실상 이탈하자 한결 마음 놓은 제국 정부는 1201년에 바로 군대를 일으켜 대대적으로 반란을 진압한다. 이런 정세 변화를 맞닥뜨린 불가리아는 결국 1202년에 이르러 동로마 제국의 상황이 안정되었음을 인식하고 결국 오랫동안 거부해왔던 평화 조약을 먼저 제의하여 체결했다. 이후 알렉시오스 3세는 1203년 7월 18일에 수도를 탈출하여 불가리아, 그리고 갈리치아 공국 등에 원병을 요청하기 위해 직접 방문하는 등 이러한 외교적 결실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